여름이 절정에 달했다. 물 머금은 산과 들은 녹색으로 출렁이고 전국의 산, 강, 바다는 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영산강이 휘우듬히 돌아가는 남도의 끝자락, 영암땅에도 피서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월출산의 여름
영암의 얼굴은 단연 월출산(해발 809미터)이다.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장엄한 산 앞에 서니 다만 겸손해질 뿐이다. 산 전체가 기기묘묘한 바위들로 둘러싸여 있어 얼핏 수석전시장을 떠올리게 한다. 돼지바위, 탕건바위, 사자바위, 말바위, 칼바위, 거북바위, 구멍바위….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바위들은 월출산의 멋을 배가시켜준다. 산행은 보통 4곳에서 시작한다. 천황사, 도갑사, 경포대, 무위사가 기점인데 어느 코스나 힘겨운 길이다. 산 좀 탄다 하는 사람들은 천황사에서 정상인 천황봉을 거쳐 바람재－구정봉－미왕재－도갑사를 종주하는 코스를 택하지만 일반인들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도갑사에서 시루봉과 매봉을 연결하는 구름다리까지만 올라갔다 와도 월출산의 면모를 어느 정도 실감할 수 있다.

산 들머리의 도갑사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로 한때는 꽤 큰 가람이었지만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버리고 지금은 규모가 매우 작아졌다. 경내에 남아 있는 해탈문(국보 50호)을 비롯해 석조여래좌상(보물 89호), 도선국사의 업적을 자세히 기록한 도선수미비(道詵守眉碑), 동자상 등은 이 절의 역사를 헤아려보게 해준다. 절 왼쪽의 용추폭포가 있는 계곡 쪽으로 등산로가 뚫려있다. 산길 여기저기 졸참나무, 굴피나무, 비목나무, 동백나무가 울울창창하다. 문득 귓가에 맴도는 물소리, 바람소리, 목탁소리가 긴 여운으로 다가온다.

도갑사에서 미왕재로 오르는 길은 대체로 평탄하다. 그러나 일단 미왕재에 이르면 산길은 험악해지는데 각양각색의 바위가 산길을 막아서기 때문이다. 여기서 빗물에 9개의 구멍이 움푹 패인 구정봉(九井峰)을 거쳐 바람재－남근바위－천황봉으로 가는 길은 인내를 실험하는 장이다. 하지만 지레 겁먹지는 마시라. 구정봉과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조망은 산행의 힘겨움을 단번에 날려 보낸다. 쾌청한 날에는 제주도까지 볼 수 있다니 조망 하나는 일품이다. 특히 구정봉은 일출 포인트로도 으뜸이고 봉우리 한쪽에 서 있는 마애여래좌상(국보 144호)도 만날 수 있다. 구정봉을 목적지로 잡았다면 월출산 남쪽 경포대 계곡에서 오르는 게 쉽고 편하다. 금릉경포대 코스는 경사가 완만하고 인적이 뜸하다. 하산길은 한결 편하다. 천왕봉에서 천황사지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을 만나게 된다. 통천문을 지나 가파르고 좁은 길을 따라 내려오면 길이 52미터, 높이 120미터의 구름다리가 나오는데 이 구름다리 밑에는 철로 만든 503개의 계단이 길게 이어져있다. 바람폭포로 가는 길이다. 바람폭포에서 천황사 매표소까지는 1시간이면 내려올 수 있다.

▲우리네 고향 같은 구림마을
월출산에서 내려오면 영암의 다양한 볼거리들이 기다린다. 월출산의 기를 받는 구림마을은 우리네 고향 같은 정취를 풍긴다. 자연 마을로는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비둘기 숲’이라는 뜻의 구림(鳩林)은 도선국사 탄생 설화와 관련이 깊다. 전설에 의하면 아버지 없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도선은 큰 바위가 있는 대나무 숲에 버려졌다고 한다. 그 때 어디선가 비둘기 떼가 날아와 도선을 둘러싸며 보호했다고 한다. 실제로 마을 안에는 설화를 뒷받침하듯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국사암이라 부르며 신성시하고 있다. 바위에는 아이 주먹 크기의 구멍이 여러 개 있는데, 바위에 구멍을 뚫고 소원을 빌면 큰 인물을 낳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구림마을은 한석봉이 스승을 따라와 배우고 자란 곳으로도 유명하다. 개성에서 태어난 한석봉은 스승을 따라 영암으로 내려와 마을에 있는 죽림정사에 머물며 글씨를 배웠다. 널리 회자되고 있는 설화 ‘한석봉 글씨와 어머니의 떡'의 배경이 된 곳이 바로 구림마을이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박흡 장군의 가택인 육우당에 가면 명필 한석봉이 쓴 현판을 볼 수 있다.

구림마을에는 주민자치조직인 대동계(향약)가 440년 동안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마을 입구 회사정은 대동계를 살피러 내려왔던 암행어사 박문수가 남루한 옷차림으로 앉아있다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밖에 왕인박사가 서기 405년 일본으로 갔다는 상대포, 고려 공신 최지몽 등 4인을 배향한 국암사, 조씨 문중 종가인 조종수 가옥 등 볼거리가 쏠쏠하다. 

마을 한복판에 들어선 영암도기박물관에도 들러 보자. 구림마을은 통일신라시대에 한반도 최초로 유약을 발라 구운 ‘시유도기(施油陶器)’를 생산했던 곳이다. 박물관에서는 100% 황토를 이용해 특허 출원한 영암도기를 옛 방식대로 생산하고 있다. 남도의 도자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장과 공방, 물레체험실, 황토 흙가마 등을 갖추고 있으며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도 따로 있어 가족 나들이 코스로 괜찮다. 또 직접 가마에 불을 지피고 무늬도 그리며 자신만의 소품을 만들어 볼 수 있다. 구림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이나 아산의 외암리 마을처럼 흙과 나무로 지은 전통가옥이 수두룩하다. 황토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마음이 내내 평화롭다. 또한 황토와 흙벽이 어우러진 민박집 구들방에서 여행의 피로를 푸는 호사(?)도 누릴 수 있다.

구림마을과 가까이 붙어 있는 왕인박사 유적지. 왕인은 백제 14대왕인 근구수왕(375∼384)때 태어난 인물로 32세 때 일왕의 요청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태자에게 글공부(논어, 천자문 등)를 가르치고 문자, 종이, 도자기 등 다양한 문화를 전파한 분이다. 유적지엔 왕인박사의 혼을 기리는 사당과 그가 공부했다는 책굴이 있고 전시관, 동상, 유허비, 문산재, 학이문, 왕인석상, 제실, 성천(담), 탄생지, 상대포 등 왕인과 관련된 유물 유적들이 가득하다. 왕인 묘는 일본 오사카 히라카타시에 있다. 유적지를 다 돌아보는데 1시간30분이면 넉넉하다.

▲발길을 머물게 하는 선사시대의 유적들
구림마을에서 독천(목포) 쪽으로 가다 선달래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청동기 시대의 집터 유적인 장천리 선사주거지가 나온다.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유적이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시종면 쪽에는 선사시대의 무덤군이 분포돼 있다. 내동리에 있는 쌍무덤은 백제시대의 고분군으로 원래는 4기였으나 1개는 훼손되고 3기만 남아 있다. 1호분(타원형)과 2호분(원형)은 거의 맞닿아 있으며 그 사이로 길이 나 있다. 동쪽에 자리한 3호분은 1, 2호분에 비해 규모가 작다. 영암에는 150기에 달하는 백제시대의 무덤이 분포돼 있다. 이들 무덤군은 시종면을 중심으로 내동리, 신연리, 옥야리에 가장 밀집해 있다. 신연리 마을 뒤쪽 구릉 정상부에 자리잡은 15기의 무덤은 축조 방법으로 보아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후반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영산강을 따라가면서 보라
영산강(호)도 영암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 호남의 곡창지대를 유유히 흘러 바다와 경계를 이룬 영산호 주변에는 F1경주장과 고급 한옥호텔(영산재), 농업박물관, 대불항, 축성사 등 볼거리가 많다. 남도의 농경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농업박물관엔 빠른 세월 속에서 하나 둘 사라져 가는 전통 농기구를 위시해 물레방아, 목장승, 허수아비, 솟대, 남근석, 돌탑, 원두막, 통방아, 디딜방아, 장독, 절구, 맷돌, 확 등 민속자료 수 천 점이 전시돼 있다. 이즈음에 찾으면 박물관 여기저기 피어난 들꽃 향기에 흠뻑 취해볼 수 있다. 농업박물관에서 나와 목포와 영암을 잇는 영산호 방조제길을 건너 목포시내를 경유, 서해안고속도로를 타면 영암 여행은 마무리된다.

※여행팁(지역번호 061)

☛가는 길=서해안고속도로로 목포까지 가서 2번 국도와 819번 지방도로를 갈아타고 영암까지 간다. 광주에서 13번국도 타고 영암 방향 진행-819번 지방도로를 타면 도갑사(월출산)로 갈 수 있다. 호남고속도로 광산 나들목-나주 목포 방면 13번국도-나주-영암-목포 방면 819번 지방도로-구림 사거리(구림마을)-왕인박사 유적지.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영암행 버스가 하루 4회 운행. 광주, 목포, 강진, 장흥, 완도, 진도, 해남에서 영암행 버스 수시 운행.  호남고속도로 종점인 광주 요금소로 나와서 제2순환도로를 타고 나주를 거쳐 영암으로 갈 수 있다. 

☛숙박=큰 시설로는 호텔현대(삼호읍 삼포리, 463-2233)와 노천탕에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월출산온천관광호텔(473-6322)이 있다. 영암읍내에 소프트모텔(471-8101), 오아시스모텔(473-0808) 등이 있다. 구림마을에 있는 대동계사(010-2034-0172)에서 민박 가능. 도갑사 가는 길에 있는 ‘안용당(安容堂 010-3114-1313)’은 340년 된 전통 한옥민박집. 서까래와 쪽마루, 구들장이 고풍스러움을 물씬 풍긴다. 월출산과 은적산 사이에 자리 잡은 월인당(061-471-7675)은 강진 만덕산 기슭의 다산초당을 지었던 이춘흠 도편수가 1년 3개월간 공을 들여 지었다. 방 세 칸에 두 칸짜리 대청, 누마루와 툇마루를 갖추고 있는데 대나무 울타리로 담장을 마무리하고 넓은 안마당엔 잔디를 깔았다.

☛맛집=영암의 맛은 단연 세발낙지와 갈낙탕(갈비탕에 산낙지를 넣고 끓인 것). 독천오일장(4, 9일로 끝나는 날)에 가면 세발낙지 등 싱싱한 해산물을 만날 수 있다. 한석봉의 어머니가 떡 장사를 한 곳이 이곳 독천시장이라는 설도 있다. 독천리에 세발낙지와 갈낙탕을 잘하는 집들이 여럿 있다. 청하식당(473-6993), 독천식당(472-4222), 영명식당(472-4027)이 추천할 만하다. 갈낙탕 1인분 1만 2000원, 세발낙지 마리당 7000원(시세에 따라 매일 가격이 다르다). 영암읍내의 대양가든(473-6565)은 백반정식이 맛깔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