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척의 땅 '강화도'에서 역사를 만나다

헬스미디어l승인2020.08.28l수정2020.08.28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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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동쪽으로 한강, 북쪽으로는 임진강과 예성강, 이렇게 세 개의 강이 합쳐지는 하구에 위치한다. 또한, 서해와 인접하고 고려와 조선의 수도와 가까워 예부터 교통과 국방의 요지로 중요 시 되었다. 강화도에 대한 기록은 고려 때부터 등장하는데, 강화도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몽골군을 피하기 위한 고려 왕실의 강화도 천도였다. 39년 간 고려는 강화도에서 몽골항쟁을 지속하였고, 섬 내 자급자족과 군수품 보급을 위한 간척사업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이후 조선에 이르러서는 양란을 겪으며 대규모 강화도 간척사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당시 강화도 일대는 스무 개가 넘는 여러 개의 섬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선을 이루고 있었다. 조선 시대 간척사업을 통해 강화도 일대는 강화도를 포함해 석모도와 교동도의 세 개의 큰 섬으로 변모하였다. 간척사업은 현대까지도 이어져 강화도 전체면적의 1/3이 간척지이며, 그중 논이 76%를 차지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강화도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초록과 황금빛의 아름다운 벼 이삭들을 볼 수 있다.

간척사업으로 이루어진 강화도 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지만, 강화도는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생생한 역사를 켜켜이 담고 있다. 강화도 부근리에서는 교과서 속 잘생긴 고인돌을 직접 볼 수 있고, 남쪽 마니산에는 우리나라의 시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이 있다. 단군의 세 아들이 만들었다는 삼랑산성과 그 안에 자리한 삼국시대 고찰 전등사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를 지켰다. 고려 왕실이 머물렀던 고려궁지, 또 그 위에는 조선의 행궁과 강화 유수부, 그리고 조선왕실 의궤를 보관했던 외규장각이 들어섰다. 그리고, 강화도령이라 불렸던 조선 25대 왕 철종의 고향 집과 그 옆에는 가장 오래된 한옥 교회 건물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사찰, 전등사

그럼 먼저 삼랑산성 속 전등사로 가보자. 김포시 대곶면에서 초지대교를 건너 남쪽으로 10여 분을 달리면 강화도에서 제일 큰 사찰인 전등사 입구에 도착한다. 전등사는 4세기 말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의 창건설이 전하는 유서 깊은 절이다. 전등사는 정족산(鼎足山)에 위치한다. 그래서 삼랑산성을 정족산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족산은 마니산이 서쪽으로 뻗은 지맥이며, 세 봉우리가 솟아 세 발 달린 솥처럼 생겼다 하여 지금의 이름이 붙여졌다. 산 모양으로 말미암아 전등사 경내에는 석탑이 없다. 정족산이라는 커다란 밥 짓는 가마솥 안에 돌을 넣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란다. 흥미로운 이야기다.

전등사는 고려와 조선 시대 모두 왕실의 비호를 받은 사찰이었다. 고려 시대 이곳에 행궁이 있었고, 충렬왕의 비였던 정화궁주가 옥등을 바치면서 지금의 전등사(傳燈寺)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조선 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마니산 사고가 화재로 소실되자, 숙종 때 정족산 사고를 지어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 의궤 등을 보관하기 시작했고, 전등사는 그 수호 사찰이 되었다.

전등사 오르는 길 초입에 여러 상점이 즐비하다. 울창한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삼랑산성 남문인 종해루를 지나고, 이윽고 전등사임을 알리는 대조루 이층 누각을 만나게 된다. 대조루 아래 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절마당에 들어선다.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석탑을 대신해 늠름하게 서 있다. 굵은 가지들을 하늘 높이 뻗어 올리고 있는 모양이 마치 수호신 같다. 전등사에는 대웅전과 약사전 그리고 범종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과 약사전은 광해군 때 지어졌는데, 조선 시대 다포양식(기둥 위는 물론 그 사이에도 공포를 짜올린 양식)을 보여준다. 대웅전은 외부는 물론 내부 역시 매우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조각들로 가득하다. 대웅전 처마 아래 네 모서리에는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유명한 나부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조각상은 대웅전을 지은 목수가 자신을 배신하고 돈만 챙겨 달아난 주모에게 벌을 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의미심장한 전설을 갖고 있다. 평생 벌거벗은 몸으로 대웅전 지붕을 떠받치며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라는 뜻이란다.

보물로 지정된 전등사의 동종은 사실 한국종이 아닌 중국종이다. 일제강점기 때 빼앗겼던 전등사 종 대신 해방 후 군기창에서 찾아온 종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 종이 11세기 말에 제작된 중국 송나라 종으로 확인되었다. 중국종은 우리나라 종과는 달리 종 머리에 대나무통 모양의 음통이 없고, 용 두 마리가 등을 맞대어 종고리를 만든다. 음통은 우리나라 종만이 가진 특징인데, 깊이 있고 청명하며 여운이 긴 소리를 만들어 내는 독특한 구조로 평가받는다.

전등사를 감싸고 있는 정족산성은 1866년 병인양요 때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친 격전의 현장이기도 하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의궤를 포함한 귀중본들을 약탈하였고 나머지는 불에 태워 없애 버렸다. 다행스럽게도 프랑스로 무단반출되었던 조선왕조의궤 297권은 145년만에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 고려궁지, 성공회 강화성당, 용흥궁과 부근리 지석묘군

외규장각은 조선 정조가 창덕궁 규장각과 함께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기 위해 별도로 세운 도서관이다. 전등사에서 북쪽으로 약 15 km 떨어진 강화읍 관청리에 위치한다. 완만한 언덕 위 외규장각이 세워진 이곳은 대몽항쟁을 위한 고려의 궁궐과 관청들이 세워졌던 장소이자, 조선의 행궁과 유수부 관헌이 들어섰던 땅이기도 하다. 여기서 고려왕궁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그것은 몽골이 화친 후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돌아가기 전 궁궐과 전각을 모두 파괴하라는 요구 때문이다. 지금은 조선 시대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 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유수부란 조선 시대 왕이 행차하는 행궁이나 주요 군사거점 지역에 설치되는 특수 행정체계인데, 강화도는 이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되어 국방요지로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었는지 알 수 있다.

고려궁지에서 10시 방향 언덕 위에는 기다란 배를 연상시키는 한옥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성공회는 16세기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고 영국 왕 스스로가 교회의 수장이 된 영국 국교를 말한다. 강화성당은 1900년 대한 성공회 초대 주교인 코프(Corfe, 한국명: 고요한)에 의해 건립되었다.

초기 그리스도 교회당인 긴 장방형의 바실리카 구조에 한옥 양식을 차용하여, 독특한 한국적인 교회를 만들어 냈다. 내부는 진갈색 목재들로 천정과 기둥, 가구들이 구성되어 예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예배당의 진중함을 자아낸다. 한국의 토착문화와 조화롭게 융합하고자 했던 영국 성공회의 노력이 놀랍다.

강화성당 입구 반대편 언덕 아래로 철종의 잠저(潛邸: 왕위계승의 적통이 아닌 자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인 용흥궁(龍興宮)이 연결된다. 용흥궁이라는 명칭은 철종이 즉위한 후 붙여진 이름이며, 원래 초가집이었던 이곳을 왕의 거처답게 다시 지었다. 넓지 않은 공간에 조선 사대부 살림집의 형태로 지어져 검소하고 소박한 느낌이다. 내전과 외전, 별전의 3개 전각과 철종의 잠저였다는 비각이 오밀조밀 모여있다.

철종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였다. 24대 왕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유일하게 남은 영조의 후손은 철종뿐이었다. 당시 강화도로 유배되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19세의 청년이 하루아침에 왕이 된 연유다. 군주로서 학문적 소양도 국정 운영에 대한 지식도 전무했던 철종의 조선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세도정치가 극에 달해 결국 동학운동이 일어나고, 조선은 백성들의 고통과 신음으로 가득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남겨둔 채 철종은 33살에 병사했다.

파란만장한 철종의 삶에 소소한 위안과 같은 고향 집을 뒤로하고, 서쪽으로 약 10여 분 차로 달리면 부근리 고인돌 유적지에 닿을 수 있다. 이곳에는 총 12기의 대형 고인돌이 남아있는데,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움집 모형과 외국의 고인돌 모형도 전시되어 있어 들판 위 선사시대 생활상을 마음껏 상상해 볼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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